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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을 위해

4시간 자고 돌아온 부산..후배의 부친상

지난주 금요일 갑자기 부산을 가게 됐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카톡이 하나 와 있었다.
전날까지 연락을 주고 받았던 친한 후배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내용이었다. 그 친구의 고향은 부산이다.
나는 영화 범죄와의 전쟁을 좋아한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부산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남자들처럼 "살아있네" "느그 서장 남천동 살재? 마! 내가 임마 어저께도 느그 서장이랑 사우나도 가고 밥도 먹고 다했어 !!" 등등의 대사를 치며 일상을 보냈고, 그 후배와도 종종 부산 얘기를 나누며 관련 대사를 주고 받고는 했다.
우선 부조금을 10만원 보냈다. '너무 먼 거리니까' 라고 생각했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정말 좋아하는 후배의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가지 않으면 두고 두고   그 친구에게 미안하고 후회가 될 것 같다는.
곧바로 부산행 비행기와 다음날 돌아오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그렇게 퇴근하자마자 김포공항으로 향했고, 저녁 8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전과 같으면 부산에 대한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찬 비행이었겠지만 마음은 무척 무거웠다. 여행의 기대감으로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는 다른 승객들과는 달리 다소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5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부산에 착륙할 것이란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다른 승객들은 곧바로 버스에 전철에 몸을 실었지만 부산 지리를 모르는 나는 우왕좌왕했다. 일단 한푼이라도 아껴보자는 생각에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주차장 끝으로 갔지만 야속한 핸드폰은 1시간 후에나 버스가 온다고 알려줄 뿐이었다.
다시 공항쪽으로 몸을 돌렸다. 공항 건널목에 수십대 늘어선 택시쪽으로 갔고 한 택시를 잡아탔다. "아저씨, 충렬사역 쪽에 있는 00 장례식장으로 가주세요" "아, 그쪽에 장례식장 하나 있어예" 김해공항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길은 적막했다. 금요일 늦은 저녁시간이라 그런지 차도 많지 않았다. 오래돼 보이는 건물과 상가들만 눈앞을 스치고 지날 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택시에서 내리자 작은 장례식장이 눈에 들어왔다. 비행으로 흩으러진 몸매무새를 고쳐 매고 떨리는 마음으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전자 게시판에서 후배이름을 찾자 3층에 식장이 마련돼 있었다. 계단을 오르고 마침내 후배의 아버지가 모셔진 식장 앞에 섰다. 상주인 후배는 눈을 감고 잠시 쉬고 있었다.
"00아!" "형님, 여기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냐" 우리는 끌어안고 한참을 울 수밖에 없었다.
사연은 그랬다. 화물차 운전을 하시던 후배의 아버지는 연세도 있으시고 하니 얼마 안 있다가 일을 그만두시겠다고 가족들에게 선언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교차로에서 덤프트럭과 부딪쳐서 돌아가신거라고. 일본 출장 중 아버지의 부고를 들은 후배는 곧바로 부산으로 날아왔던 거였다.
"최근에 아버지와 금전 문제로 사이가 소원했었는데 풀려고 마음 먹고 있었거든요. 부모님이 기다려주시질 않네요"
나 역시 아버지가 또 다른 사업을 벌이시겠다며 몇십억의 빚을 지고 계시다. 급한 불을 끄시라며 나와 여동생이 아버지께 드린 돈만 5억원이다. 일반 빚쟁이들처럼 아버지께 소란을 피운 적은 없지만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들며 대화가 점점 끊기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후배의 부고 소식을 들으니 더욱 가슴이 아팠다.
후배에게 위로의 말을 전달하고 12시쯤 인근 모텔을 찾았다. 토요일 7시 비행기를 예약했던 터라 실제로 잘 수 있는 시간은 4시간 남짓이었다. 새벽 1시쯤 피곤에 찌들어 잠이 들었고 5시10분경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그렇게 다시 택시에 몸을 싣고 김해공항에 도착했고, 다시 김포공항에서 집으로 이동했다. 누가 보면 얼마나 친한 후배라고 그렇게 돈과 시간을 많이 할애해서 부산까지 날아갔냐고 할 수 있을게다. 하지만 난 그 정도로 이 후배를 아낀다. 제2의 가족이라고 느낄 정도로. 나도 부모님께 더욱 잘해야 하는데 참 어렵다. 그게 인생인 걸까.